세계 문학 전집

우연찮게 몇 번을 이어서 서점 이야기를 쓰다보니 옛날에 읽었던 세계 문학 전집이 생각났다.

우리 집에는 세계 문학 전집이 두 질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오래 전에 사셨을 조악한 지질의 종서(縱書)로 인쇄된 전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삼성당에서 나온 50권짜리 전집이었는데, 내가 중학교 때쯤 부모님이 사 들이셨다. 물론 종서로 된 책은 가끔 펼쳐 들고 구경만 했지 거의 읽지 않았고, 삼성당 전집은, 기억을 떠올리곤 그거 뭐 얼마나 읽었을까 싶었는데, 천천히 되짚어 보니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래도 꽤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전집에서 [죄와 벌]도 읽었고, [전쟁과 평화]도 읽었고, 가물가물 하지만 [적과 흑]도 읽었고, [백경]은 2/3 정도까지 읽다 말았고, [셰익스피어 희곡집]은 거의 읽었고, [일리아드], [오딧세이]도 절반 정도는 읽었다. 좀 더 현대에 가까운 소설 중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읽었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읽었고, [분노의 포도]도 읽었고, 레마르크의 [개선문], 카슨 맥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도 읽었다.

하지만 그 전집에는 카프카도 없었고, 보르헤스도 없었고, 카뮈도 없었고, 제인 오스틴도 없었고, 포크너도 없었다. 카뮈의 [페스트]는 종서 전집에 있어서 종서로 읽었지만(아마 그게 내가 읽은 유일한 종서책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작가들은 집에서 읽지 못했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문학 전집과 멀어진 후로 결국 지금까지도 읽지 못하고 있다.

삼성당 전집에서 제일 좋아했던 책은, 부끄럽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작품성이니 뭐니해도 역시 재미있으니까. 너무 재미있어서 자주 되풀이해서 읽었다. 맞춤법 규정이 정확히 언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성당 전집에서는 영어 장음을 모음을 반복해서 표현했다. 그래서 그 책에서, 레트 버틀러는 찰스턴이 아닌 차알스턴 출신이었고, 스카알렛은 레트와 아틀란타의 피이치 트리 거리를 거닐었고, 둘은 결혼해서 뉴우오올리언즈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지난번에 J와 함께 뉴유오올리언즈에 갔을 때 가아든 디스트릭트에서 봤던 화려한 문양의 철제 난간을 단 이쁘장한 이층집들을 레트는 천박하다고 싫어했지만, 스카알렛이 고집을 부려 살 수 밖에 없었더랬다. 시간이 모자라 가보지 못했던 뉴우오올리언즈 근교의 플랜테이션 농장들 중에 스카알렛이 사랑했던 타라 농장 같은 곳도 있었을까.

먼 훗날 어딘가에 정착을 하게 되고, 내 집이 생긴다면, 사방이 책꽂이로 둘러싸인 서재를 하나 만들고 싶다. 거기에 좋은 책들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깊이 음미하면서 읽고 싶다. 못 읽었던 카프카도 읽고, 보르헤스도 읽고, [백경]도 마저 다 읽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만큼 자주 되읽었던 [분노의 포도]는 영어로도 다시 읽고 싶다. 눈 내리는 겨울밤이라면 아내와 함께 발을 맞대고 앉아 [전쟁과 평화]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책 읽는 이는 문자향에 취한다고들 하지만, 문자의 향이란 그 문자를 쓰고 읽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향기가 스며든 것일 뿐이다. 책을 읽으며 사람들은 그렇게 쌓인 사람의 향기를 맡고, 거기에 희미하게 자신의 향기를 더한다. 마치 아슴한 지평선을 바라보듯이...

나는 오늘도 사람의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든 나만의 세계 문학 전집을 꿈꾼다.

by khakii | 2006/11/11 10:24 | 책 이야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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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psy at 2006/11/14 15:19
난 대지랑 몽테크리스토백작이랑 올리버트위스트 젤 재밌게 봤는데..
근데 그게 그책들 맞나...
Commented by khakii at 2006/11/15 00:50
아, 대지도 있었구나. 몽은 없었던거 같고 올은 가물가물하네.
Commented by emage at 2006/11/20 18:42
그런데, 횡서가 '가로쓰기' 아닌가요?
Commented by khakii at 2006/11/20 19:14
흑 그러네요-_- 왜 횡서라고 쓰고 철썩같이 '세로쓰기'라고 생각했는지..;;;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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